2017년 2월 18일 토요일
이익만 따르면 원한이 많게 마련?
논어(論語) 리인(里仁) 편에 공자(孔子)께서 언급한 말 중에는 “어진 이를 보면 나도 그와 같이 될 것을 생각하며, 어질지 않은 이를 보면 마음속으로 자성(自省)한다[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라고 했다.
어질거나 어질지 않은 이를 판단하는 것 자체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감히 말할 수 없는 말 같다. 우리가 지금 사는 세상에서 누가 옳고 그르다는 것을 감별하는 것조차 힘든 세상인데, 2,500여 년 전에 공자께서는 어질거나, 어질지 않은 이를 판단했으니, 지금까지 유명한 인물 - 4대성인(聖人) 중 한 인물 - 로 인정을 받는 것 아닌가?
많은 이들이 공자라는 인물의 이름만 나와도 ‘고리타분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을 이해한다면, 함부로 공자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놓든지, 글자로 남겨서는 안 될 것으로 미루면서도, 그의 이름을 되뇌고 있는 이들이 있으니 세상이 잘 돌아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도 해보기 때문에 적어 본다.
모든 사람들의 실 내막을 보면 어질거나 어질지 않은 이를 쉽게 판단할 수는 없으나,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아 글로 만들어 본다.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은 18일 오후 4시30분부터 광화문광장에서 제16차 촛불집회를 어김없이 개최했다는 뉴스다. 공식 주제는 "탄핵지연 어림없다! 박근혜 황교안 즉각퇴진! 특검연장! 공범자 구속을 위한 16차 범국민행동의 날'로 정했단다.
아시아경제는 “이날 집회에는 추위에도 불구하고 오후 9시30분 현재 주최측 추산 서울 광화문에만 80만명, 지역 4만4800여명 등 총 84만여명이 참가했다.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에 대한 법원의 구속영장이 발부되면서 100만명 돌파는 이후로 미뤄졌다.”고 보도하고 있다.
더불어 탄핵반대집회도 13차 집회를 했다는 뉴스다.
WOW한국경제TV는 “이날 오후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이하 탄기국) 주최로 열린 탄핵반대 집회에는 한국당 김진태, 조원진, 윤상현, 전희경, 박대출 의원을 비롯해 대선출마를 선언한 이인제 전 최고위원이 참여했다.”고 적었다.
지난주 토요일만 해도 대한문 앞에 나타나 못된 열변을 토하고 있던, 김문수(1951~ ) 전 경기지사의 이름이 없어 참가하지 않은 것 같다. 허나 그는 청계광장에 나타나 어김없이 한 소리하며 자신의 얼굴을 깎아내리고 있었다. 지난해 12월까지만 해도 김문수는 박근혜 탄핵 찬성을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지금은 탄핵 반대집회를 따라다니면서 국민으로부터 외면을 당하려고 한다. 마치 미쳐 날뛰는 것 같이. 이걸 두고 ‘2차 변질’이라는 말로 다른 이들은 대신하고 있다.
‘새로운 한국을 위한 국민운동’ 주최로 열린 청계집회에 대선 출마를 준비 중인 김문수 비상대책위원이 참여하여, "대통령을 효수하고 삼성 이재용을 잡아먹는 민중혁명을 막을 길은 태극기밖에 없다"고 하며, "문재인 씨 등 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전부 나와 선동하고 목을 치겠다는데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누가 대한민국을 지키겠나"라며 마지막 발악을 하며 자신을 망치고 있었다.
2012년 대선까지만 해도 김문수 지지율은 지금처럼 바닥까지 내려앉지는 않은 것으로 안다. 하지만 지금은 회생불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로 이판사판(理判事判) - '막다른 궁지' - 의 끝장을 내겠다는 것 같다. 왜 이렇게 망가져가고 있는 것인가? 그의 지나친 대권욕심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다리를 펼 곳도 찾지 못하는 인물이 된 것이다.
2016년 4월 총선 당시 대구를 택한 것은 누가 봐도 놀랄 일이었다. 출신지가 경북 영천이고 안동 김 씨라는 배경만을 믿고, 19대 총선에서 참패를 했던 상대당 김부겸 의원을 가볍게 꺾을 것으로 예상했던 것이 빗나가면서, 그의 정치사는 끝장으로 가고 있었다. 그에게는 확실한 정치적인 배경이 없었는데도 경기도를 벗어나 마치 외지 같은 곳을 택했던 것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비박계도 친박계라고도 할 수 없는 그의 자세도 문제였다고 많은 이들이 입을 모은다.
그가 지금 박근혜 살리기에 앞장서서 살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생각해본다. 길이 아닌데 가려고 하는 자세는 모험이 아니고 무엇인가? 국민을 배반한 인물로 가고 있다는 중이다. 마치 그의 얼굴에 나타난 운명적인 형상이 문제라고 할 것 같아 보이기도 하다. 덕도 없고 복까지 쳐버릴 것으로 보아지는 얼굴처럼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워낙 탁월한 두뇌를 가지고 있으니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그가 지금 택하고 있는 길은 길이 아닌 것 같아 아쉽게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진정 박근혜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었다고 김문수는 생각하며, 박근혜를 옹호하려고 하는가? 하지만 박근혜도 놀랄 일이라고 본다. 그는 1980년대 당시에는 노동운동의 대부라고 할 정도로 진보적은 사고로 행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1996년 신한국당(자유한국당 전신)으로 입당하면서 여러 사람들로부터 배반적인 입장을 나타나게 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때를 ‘1차 변질’이라고 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보수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당연한 것 같이 현실 한국적인 보수 - 말도 안 되는 보수 - 보수인지 강제(强制)인지도 구분하기 힘든 억지의 보수 - 전혀 순수성이 없는 보수도 아닌 보수 - 보수라는 말도 부끄러운 보수적인 데로 흘러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 는가?
오직하면 인적위자(認賊爲子) - 도둑을 아들로 삼는 이 - 의 잘못된 생각을 진실이라고 믿으려고 하는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며, 사회를 온갖 악의 소굴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이들과 같이 하는 것을, 자랑삼는 현실이 더 부끄럽지 않은가! 이런 상황까지 몰고 가면서 대권을 잡는다면, 또 이명박근혜 같은 무법천지의 광야로 가야 할 일만 남게 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결국 김문수도 그런 부류의 인물이었던가? 두 번에 걸쳐 경기도지사 당시와 너무나 달리 변한 그의 행보에 김빠지게 만들고 있어 따분하기만 하다.
공자(孔子) 말씀 중에 “이익만을 따라 행동하면 원한이 많게 된다[放於利而行 多怨].”고 하는 말씀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것 같다. 더해서 어진 이를 보면 나도 그와 같이 될 것을 생각하며, 어질지 않은 이를 보면 마음속으로 자성(自省)하는 자세를 갖추는 것도 우리 몫이지 않은가?
원문보기;
http://www.wowtv.co.kr/newscenter/news/view.asp?bcode=T30001000&artid=A201702180103
탄핵 무효 탄핵반대 집회, 김문수·이인제·김진태 등 참석 - 한국경제TV
자유한국당 친박(친박근혜)계 전·현 의원과 대권 주자들이 18일 대한문·청계광장에서 열린 탄핵반대 집회에 대거 합류했다.이날 오후 덕수궁 대한...
www.wowtv.co.kr
http://premium.mk.co.kr/view.php?no=17769
태극기집회 나간 김문수 변신 혹은 두번째 전향
[노원명의 뉴스메이커-5] 두 번째 전향인 거지. 며칠 전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를 잘 아는 한 정객과 통화하면서 나온 얘기다. 탄핵 반대 태극기집...
premium.mk.co.kr
http://v.media.daum.net/v/20170218220205768
[16차 촛불집회]추위 속 84만 촛불 "朴 레드카드"..화난 맞불 "김정은이 배후"(종합)
[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 이현주 기자, 김민영 기자]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 결정이 다음달 10일께로 임박한 가운데, 18일 오후 촛불과 맞불이 다...
v.media.daum.net
http://news.naver.com/main/read.nhn?oid=421&sid1=102&aid=0002568448&mid=shm&viewType=pc&mode=LSD&nh=20170218223529
태극기집회 참가자, 교통경찰 폭행해 입건
(서울=뉴스1) 이원준 기자 = 18일 오후 서울 대한문 앞에서 개최된 '제13차 탄핵기각 총궐기 국민대회'에 참여한 50대 남성이 무단 횡단을 제지하...
news.naver.com
2016년 4월 4일 월요일
자유경제원은 이승만 휘를 던지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연구소인 자유경제원은 1996년 한국경제연구원 부설 자유기업센터로 출범했다. 1997년 사업 독립성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비영리 재단법인으로 분리한다. 재산이 시민권보다 더 위라고 생각하는 뉴라이트(New Right=신우익)라고 보는 자유경제원은 지난해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 당시에도 최선봉에 서서 단일교과서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단체로 알려졌다. 이곳 사무총장 출신 전희경은 한국사교과서 국정화의 전도사로 불린다. 그는 4·13 제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 9번에 안착한 상태로 보면 자유경제원이 박근혜정권과 얼마나 밀착한 상태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출처; 뉴데일이
참고가 된 원문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1770&cid=46626&categoryId=46626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8228&cid=40942&categoryId=31645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2534&cid=46626&categoryId=46626
http://blog.naver.com/tleowndtla/220644134803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49378&cid=40942&categoryId=31645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06108
자유경제원은 4일 '제1회 건국대통령 이승만 시 공모전'에서 최우수작과 입선작으로 상을 주고, 다시 빼앗는 것도 모자라 “해당 사안이 교묘한 서술을 통해 행사 취지를 정면으로 거스르고, 주최 측 및 다른 응모자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초래했다”며 “법적 조치를 포함해 강력히 대처할 것”이라고 했다는 뉴스가 황당하게 한다. 이번 공모전 심사위원장은 복거일(소설가) 이다.
심사위원을 비롯해서 그 위원장이 책임을 져야 옳은 것 같은데 시를 출품한 이를 벌하겠다면 후일 자유경제원을 어떻게 믿고 출품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제1회 건국대통령 이승만 시 공모전’ 최우수상 ‘To the Promised Land’의 각 행 첫 문장 첫 글자를 세로로 읽으면 ‘NIGAGARA HAWAII’(니가 가라 하와이)다. 입선작 ‘우남찬가’도 ‘한반도 분열/ 친일인사 고용 민족반역자’로 이어진다(출처; 경향신문)
물론 그 두 작품이 그대로 읽으면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을 칭송하는 문장이 된다. 각 횡(橫=가로)으로 서술된 문장의 내용은 이승만을 칭송하는 글이 되지만, 앞 한 글자씩 따서 종(縱=세로)으로 읽으면, 이승만의 과거 못된 행적이 그대로 나타나는 숨은 뜻이 함유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은이의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 것인가!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정체성(正體性)이 강한 이념은 쉽게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옳은 것을 옳다고 하면 옳은 것이 되지만, 그른 것을 옳다고 인정하라면 인정할 수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이승만의 행적 중 옳게 일한 것은 독립운동당시 미국에서 고생할 때가 전부였다고 본다. 그리고 해방 이후 한국으로 와서 정치에 가담하고부터 거의 비틀어지기만 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두 달이 지난 10월 16일 본국 땅에 발을 딛기 전, 일본 토쿄에서 맥아더 장군, 하지 미군정 사령관과 만나 회합을 할 때, 이승만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과 한국민주당의 영수직을 거절한다. 그러나 1945년 10월 23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에 추대된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초기에 조선공산당과 한국민주당 등 좌우익의 거의 모든 조직들이 참여하는 단체였지만, 친일파 처리에 대한 이견과, 이승만의 강한 반공주의로 인해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계 인사들은 모두 이 조직에서 탈퇴하게 만든다. 김일성을 위시한 북한이 공산화하고 있는 것에 대립각을 세우기 위한 것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이승만은 미국의 힘을 이용해서 우익세력만 같이하겠다는 강한 집념을 지닌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발표 이후, 1946년 1월 8일 국론분열을 막기 위해 한국민주당, 국민당, 조선인민당, 조선공산당 등 좌우익의 주요 정당이 모여 합의한 이른바 ‘4당 캄파(Kampa=정치조직활동)’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1946년 2월 8일에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대한독립촉성국민회’로 확대 개편한다.
1946년 2월 14일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를 앞두고 미군정이 조직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 참여해 의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소련군과 타협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 하자 의장직을 사퇴하고 지방 순회에 나섰다. 그는 미소공동위원회에 반대하며, 1946년 6월 3일에는 정읍에서 “남쪽만의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조직이 필요”하다고 발언해 38선 이남에서라도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북쪽은 관심조차 없고 오직 자신의 안녕만을 우선시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하자 1946년 12월 미국을 방문해 워싱턴에서 소련과의 타협에 반대하는 활동을 했고, 때마침 1947년 3월 12일 트루먼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이승만의 미국에서의 활동이 국내에 크게 보도되었다. 이승만은 귀국길에 중국에 들렀고, 1947년 4월 21일 장제스[蔣介石]가 제공한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면서 건제함을 과시한다.
1947년 9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되고,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자 유엔 감시 하에서 실시되는 선거에 참여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동대문구 갑 지역구에 단독으로 출마하여 무투표 당선된다. 1948년 5월 31일 국회가 소집되자 선출된 국회의원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그가 의장에 선출되는 연장자 우선권? 그리고 7월 20일 국회 간접 선거에 의해 대한민국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7월 24일 대통령에 취임할 때부터 대한민국은 위태로웠다.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일민주의’를 내세웠다. 모든 사람은 국가 앞에서 평등해야 하며, 그 평등 위에서 국가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48년 12월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으로부터 승인을 받은 후 장면(張勉)은 주미한국대사로 간다.
1949년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활동으로 일본 및 총독부에협력하였던 인사들을 처벌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고, 농지개혁을 추진·실시하였다. 통일문제에 대해서는 ‘북진통일론’을 주장해 북한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이 한국군의 증강을 제한하였으나 미국의 도움 없이 직접 공군 창설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해 피란을 떠나 임시수도를 부산에 세웠고, 1951년 11월 19일 자유당을 조직하였다. 또한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어 있는 헌법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것으로 개헌을 추진하였다. 개헌 추진 과정에서 야당이 반대하자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 계엄령을 실시하였고, 같은 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새로운 헌법에 의해 1952년 8월 5일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74.6%의 지지로 재차 당선되었다.
미국의 정전협정 추진에 반대하며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 석방을 지시하였고, 이로 인해 미국 정부와 갈등을 빚었지만, 정전협정에 반대하지는 않되 참여하지 않는 조건으로 미국과 타협하였다. 정전협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미국과의 협의를 거쳐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조인하였다. 1954년에는 미국을 방문해 의회에서 연설을 하였고,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사령관 관할 하에 두는 대신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를 약속받는 ‘한미합의의사록’을 체결하였다.
1954년에는 이른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을 통해 대통령직 연임 제한 조항이 초대 대통령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도록 개정하였다. 1956년 5월 15일 새로 개정된 헌법에 근거해 대통령 선거를 실시해 56%의 득표로 당선, 제3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전후 복구와 경제부흥을 위해 1956년 경제개발계획을 미국에 제출하였지만, 미국 정부의 거절로 실현되지 못 하였고, 1958년 경제개발계획의 입안과 실시를 위해 산업개발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산업개발위원회는 1960년 1월 산업개발 3개년계획을 발표하였지만 곧 이은 4·19혁명으로 실행되지 못 하였다. 1958년 12월 24일에는 국가보안법 개정으로 미국 정부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 이기붕과 러닝메이트로 출마하였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선거 중 사망해 무투표 당선되었다. 하지만 3·15부정선거로 4·19혁명이 발발하자 4월 2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며,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梨花莊)에 잠시 머물다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사망하였다. 같은 해 7월 27일 가족장으로 영결식이 있었고,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발췌)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제1회 건국대통령 이승만 시 공모전'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폄훼하고 비난한 두편의
시가 최우수상과 입선작으로 수상된 것이 뒤늦게 확인됐다. (사진=인터넷 커뮤니티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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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백의겨레가 함께해야 한다는 백범 김구(金九; 1876(고종 13)∼1949.) 선생과 달리 이승만은 국민은 안중에 없었고 오직 자신의 영달만이 앞서야 하는 노옹(老翁)의 고집이 가득한 나머지 국민으로부터 멀어지기를 바란 사람 같았다. 그의 이념은 자유주의라고 하지만 국민 속에서 독재자로 더 잘 알려진 것으로 보면 우리들의 귀감이 될 수 없는 인물로 봐야 한다. 그러나 자유경제원은 이승만의 이념과 그의 정체성을 따르고 싶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자신들의 생각과 같이 모든 이들이 같은 이념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은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심사를 했으면 준 상을 걷어 들이고, 법을 이용해서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어리석은 짓을 할 생각을 한단 말인가? 참으로 가소롭지 않은가?
자유경제원은 이승만을 기리는 집단이 아니라, 결국 그 휘(諱=지위가 높은 이의 이름)를 시궁창으로 던졌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인가? 나만의 이념이 불러온 더러운 유산 아닌가?
출처; 뉴데일이
참고가 된 원문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1770&cid=46626&categoryId=46626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8228&cid=40942&categoryId=31645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2534&cid=46626&categoryId=46626
http://blog.naver.com/tleowndtla/220644134803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49378&cid=40942&categoryId=31645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06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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